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제1차: 보헤미아-팔츠 전쟁 ([[1618년]] ~ [[1620년]]) == [youtube(MBkAKw40-pY)]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전인 15세기 무렵부터 [[얀 후스]]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영향이 컸지만 양형 [[영성체]] 방식을 행하는 가톨릭의 모습도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서 양형 영성체는 [[빵|성체]]와 [[포도주|성혈]]을 같이 받아 먹는 것으로서, [[중세]] 이후 성혈 영성체는 정해진 이들에게만 한정되었고, [[트리엔트 공의회]]로 1564년부터 독일 지역에서 1년간 잠시 시행되었다가 철회되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예외적으로 2세기 전 후스파 전쟁의 종결 당시 후스파 중 온건파였던 양형 영성체파와 가톨릭 세력과의 타협으로 '형식적으로 로마 교황의 수장권을 받아들이되 성혈과 성체 모두 영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가톨릭을 고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른 지역들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로 개종한 지역이 많았으나 [[페르디난트 1세]]의 대항종교개혁과 [[루돌프 2세]]의 재가톨릭화로 인하여 대부분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하였다.],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헝가리 왕국 서북부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맞선 중부유럽의 방파제이자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의 종속국으로 헝가리인이 자치를 누리던 동부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 지역은 헝가리인 상당수가 개신교로 개종했다.]과 비교했을 때 이질적이었던 보헤미아는 동생 [[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마티아스]]의 봉기로 수세에 몰린 루돌프 2세[* 루돌프 2세는 나중에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의 난동 덕에 보헤미아인과 마티아스에 의해 감금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뒤는 마티아스가 이었다.]를 협박해 신앙의 자유를 받아냈다. 그런데 마티아스는 이미 고령인데다가 자식이 없었던지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찾았고, 사촌동생인 내지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카르니올라 공국|크라인 공국]],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트리에스트 제국자유도시]]가 포함되었다.]의 [[페르디난트 2세|페르디난트 대공]][* 페르디난트 1세의 3남 카를 대공의 맏아들이었다.]이 거론되었다. 다만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때까지 워낙 조용히 살다보니 [[압스부르고 왕조|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탐탁치 찮게 여겼고, 페르디난트는 에스파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했는데 재산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황제로 선출되기 전부터 빚을 안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후계자 선정은 마쳤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황제로 선출되는 과정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7명의 [[선제후]]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3명의 성속제후인 [[마인츠]] · [[트리어(독일)|트리어]] · [[쾰른]] 대주교는 가톨릭이었고 4명의 세속제후 중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루터파[* 브란덴부르크는 또 애매한게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칼뱅파로 개종했으나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상속 분쟁에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기 위한 개인적인 개종이어서 백성들은 여전히 루터파를 믿었다.], 팔츠 선제후는 칼뱅파였다. 남은 한 명의 선제후가 바로 보헤미아 왕이었는데 이 보헤미아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 그나마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는 역외 영토였다. 다만 이 당시는 오스만 제국과 에르데이 공국의 존재로 인해 헝가리 왕국 영토의 1/3인 현재의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서부 일부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와 함께 겸했기 때문에 마티아스는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보헤미아 왕위를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fenestration-prague-1618.jpg]] 문제는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이 된 골수 가톨릭 [[페르디난트 2세]][* 게다가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자이기도 했다.]가 가톨릭 신앙만을 강제하려 했고, 이에 분노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서 황제의 대리인으로 와있던 가톨릭 관리 마르티니츠 백작과 츨룸 백작 2명 및 황제 대리인의 비서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를 창문밖으로 내던진 '''제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위 이미지)'''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 아파트 5층 건물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정작 [[거름]]더미에 떨어진 바람에 높이에 비해서는 멀쩡했다고는 하는데...자존심에 상처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얼떨결에 같이 창문 밖으로 투척당한 비서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는 날벼락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귀족으로 봉해졌는데 여기서 황제가 부여한 작위가 baron von Hohenfall, 우리 말로 하면 고공추락 남작이다. 제1차는 [[후스 전쟁]] 때 1419년에 강경 후스파들이 시의회에서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진 사건. 2차 때 3명 전원이 생존한 것과 반대로 시의원 7명 전원이 떨어져 사망했다.] 보헤미아 왕은 선출되는 방식이 특이했는데 약 1,400명의 귀족 가문의 대표가 의회에 모여 왕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마티아스가 부탁하고 설득해서 1,400명이 모여 페르디난트를 뽑아놨더니 뽑아논 지 3일도 안 돼서 저런 협박을 한 터라 분노가 더했다. 이를 계기로 1618년 겨울, 보헤미아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마티아스 황제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도 보헤미아에 동조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해서 [[빈(오스트리아)|빈]]을 포위하기도 하는 등 보헤미아 반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보헤미아 의회에서도 페르디난트를 대신할 새로운 왕을 찾는데, 여기서 선택된 사람이 팔츠 선제후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사위였던 [[프리드리히 5세]][* 여담으로 그의 아들인 루퍼트 공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잉글랜드 내전]]에서 [[찰스 1세]] 측에서 싸웠다. 또한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인 [[팔츠의 조피]]는 하노버의 아우구스트에게 시집가는데 이로 인해 [[명예혁명]] 이후 [[하노버 왕조]]가 들어섰다.]였다. 보헤미아 왕위를 권유받은 프리드리히 5세는 고민에 들어갔다. 선제후로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보헤미아 왕을 겸하게 된다면 황제 선거에서 가톨릭 측 페르디난트를 강하게 견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황제의 자리에 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헤미아를 덥석 먹었다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그로를 사서 역공에 시달릴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5세는 여러가지를 고려한 끝에 장인의 나라인 잉글랜드의 지원을 믿고 왕위 수여를 위해 영지였던 팔츠를 떠나 보헤미아로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가는 와중에 "팔츠령을 보혜미아로 가져가는구나."라고 말했고 이는 나중에 다른 형태로 실현되고 말았다. 더구나 지원해 줄 거라 믿었던 장인마저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1619년 11월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로 가던 중 마티아스 황제가 죽었다. 프리드리히 5세가 대관식을 치르러 '''가고 있던 중이라''' 폐위당하기는 했어도 일단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 자격으로 황제 선거에 출석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여기저기 밑밥을 깔아논 페르디난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심지어 공석이었던 프리드리히 5세를 대신해 나온 팔츠 측 대리인도 대세에 밀려 페르디난트를 선출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30년 전쟁 편에서 맨 처음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 사건이다.] 그렇다고 보헤미아 왕이 된 [[프리드리히 5세]]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도 서술한 바와 같이 보헤미아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특이한 경우였는데, 프리드리히 5세도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의 아내이자 제임스 1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는데 여자가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헤미아의 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결국 1년 만에 보헤미아의 여론은 "또 다시 외국인 괜히 데려왔다."로 모아졌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5세]]가 칼뱅파였던 탓에 다수를 차지하던 루터파의 지원을 얻지 못했던 반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와 그 수하였던 명장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를 위시한 가톨릭 세력과[* 이 과정에서 공수표를 좀 남발했다. 뒤처리는 잘 했지만 말이다.] 에스파냐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에스파냐의 원군은 다른 개신교 세력이 막아줄 거라 기대를 하고 황제와의 대결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제국과 보헤미아의 개신교 세력이 기대할 수 있는 주요 외국으로는 같은 개신교 국가 중에서는 덴마크와 스웨덴 및 잉글랜드가 있었고, 가톨릭 국가 중에서는 [[사보이아 공국]][* 사보이아 공국은 에스파냐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거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다보니 이웃한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나중에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편승하여 프랑스와 맞선 결과 [[사르데냐]]를 받아 [[사르데냐 왕국]]을 선언하였고,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였다.]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숙적인 프랑스가 있었다. 우선 스웨덴은 당시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는 상태였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폐위당한 전 왕이자 사촌 형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와 스웨덴 왕위 계승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프리드리히 5세]]가 또다른 숙적 잉글랜드 왕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지원을 주저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5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보이아 공작 밑에서 용병 군대를 이끌던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를 보헤미아로 데려왔었는데 이때 부대를 빌려오며 했던 약속이 "부대 빌려주시면 황제 선거에서 공작님 밀어드릴께."였다. 당근 황제 선출은 물 건너갔고 먼 곳까지 대여한 부대를 돌려받기도 쉽지 않게 된[* [[사보이아 공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만스펠트에게 회군할 것을 명령했지만 만스펠트가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지원이 끊어진 만스펠트는 "안개를 먹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참고로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안토니오 꼬레아의 요청으로 사보이아 공국에 뒷공작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소설에서도 만스펠트의 "안개를 먹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 공작은 열 받은 나머지 페르디난트 2세가 에스파냐에 요청한 원군을 그대로 독일 방면으로 통과시켜 주었다. 프리드리히 5세가 믿었던 잉글랜드군도 네덜란드 방면의 에스파냐군에게 발목 잡혀 팔츠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스피놀라[* 이탈리아계 에스파냐 장군으로 이 사람의 증손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알만사 전투, 루차라 전투와 바르셀로나 공방전 등에서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함께 활약했다.]가 이끈 에스파냐군이 팔츠를 손쉽게 점령하며 프리드리히 5세는 본진을 잃고 멀티만 남는다. 1620년 11월 8일, 보헤미아의 빌라호라(백산)에서 부쿼이 백작이 이끌던 제국군 30,000명과 [[안할트]] 백작이 중심이 된 보헤미아+독일군 20,000명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제국군의 대승리로 빌라호라 전투가 끝나고 [[프리드리히 5세]]가 외가인 네덜란드로 망명[* 결국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보헤미아 땅을 밟지 못했고, 그에게는 즉위 시기에 빗댄 별명인 '''겨울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만이 남게 된다.]하면서 1차 시기는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